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문단 편집) === 제49회 ~ 제50회(마지막회) === * 명태조 [[주원장]]이 [[1차 왕자의 난]] 직전에 죽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주원장이 죽은 날은 홍무 31년 윤 5월 10일(1398년 6월 24일)이고, 1차 왕자의 난은 같은 해 8월 26일에 일어났다. 하지만 왕자의 난 이전에 조선에서 주원장의 죽음을 안 것은 작가의 각색.[* 하지만 첩자 등 비공식 루트로 미리 정보를 얻었을 수는 있다. 당시 조선은 요동 정벌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요동과 명나라 수도에 첩자를 심어뒀을 가능성이 있다. 극중에서도 공식적인 사신을 통해 알게 된 게 아니라 현지에 심어놓은 간자(첩자)들의 밀서로 알게 된 것으로 나온다.] 왕자의 난 이후의 기록인 태조실록 15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10월 3일(을사) 1번째 기사에 따르면 이 시기에서야 비로소 조선에서 주원장의 죽음을 알게 된 것으로 나타난다. 여담으로 정식으로 명나라에서 주원장의 죽음을 알리는 사신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것은 반년 뒤이다. 출처는 태조실록 15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12월 22일(갑자) 1번째 기사 "명나라 태조 고황제의 부음과 연호를 알리는 예부의 자문. 대통력 1부를 함께 보내오다". * 주원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도전이 후계자가 세손인 주윤문이라 삼촌들과 [[정난의 변|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 주원장이 죽고 황위를 둔 내전인 [[정난의 변]]이 일어난다. * 무인정사 직전의 상황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용재총화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실제로는 대충 다음과 같다. 우선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나고 내려가기 전에 송별회에서 하륜이 일부러 술을 쏟아 날벼락을 맞은 이방원이 화가 나서 집에 가는데 하륜이 사과해야 한다면서 따라가서 누가봐도 의심하지 않을 절묘한 독대 자리를 만들어 정도전의 움직임에 대해서 논의하고 다른 계책은 없고 선수를 처야 한다며 계략을 진언한다. 이때 안산군수 이숙번의 군대가 한양에 들어와 있었는데 신덕왕후 사후에 능침 작업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이걸 이숙번이 맡게 되었고 이 군사를 이용하여 정도전을 치자고 한 것. 즉 1차 왕자의 난 당시 주력군은 이방원 개인의 사병과 이숙번의 군사였다. 그러나 이 기록을 제작진은 의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정도의 병력으로 과연 도성을 뒤집을 수 있었겠냐는 것. 그래서 하륜이 충청도에서 추가 병력을 이끌고 오는 것으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렇게 되면 충청도 병력이 한성까지 올라오는데 어째서 아무런 보고가 없었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충청도에서 서울까지는 빨라도 3-4일은 걸린다. 급작스럽게 쿠데타를 일으키기에는 너무 요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드라마 종반부에 정도전의 불교 --극딜-- 비판 논문인 불씨잡변이 나온 것 역시 역사절 사실. 불씨잡변은 1398년에 음력 5월에 저술된 정도전의 마지막 글 중 하나다. 작중에서 정도전이 이를 조준에게 보여주면서 서문을 써 달라고 하며 조준과 화해할 계기로 삼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픽션. 조준이 이를 거절하며 "권근에게 써달라고 하시오"라고 하는 것은 권근이 불씨잡변에 서문과 주석을 달았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 왕자들이 정도전 일파의 꾐으로 태조의 병문안을 갔다가 등불이 없는 것을 보고 의심하는 것은 실록[*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기사) 1번째기사]에 나와있는 사실이다. 실록에서는 이방원이 배가 아프다며 일단 뒷간으로 피신하는데--급똥--, 드라마에서는 누워있는 이성계 앞에서 무릎꿇고 정도전이 살려주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실록의 왕자의 난 당시 기사가 중구난방에 모순적인 면이 많은데다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는 기록의 진위 자체가 의심되는 면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각색이 필요한 장면이었다. 다만 작중에서는 정도전이 이방원을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긴 했었기에(결국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실록에 충실한 묘사였다고도 볼 수 있다. * 이방원 일파의 병졸들 일부가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민무구·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겨우 10명뿐이고 보졸(步卒)은 겨우 9명뿐이었다. 이에 부인이 준비해 둔 철창(鐵槍)을 내어 그 절반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여러 군(君)의 종자(從者)들과 각 사람의 노복(奴僕)이 10여 명인데 모두 막대기를 쥐었으되''', 홀로 소근만이 칼을 쥐었다."라는 실록의 기록을 참조한 묘사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光化門)으로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정예(精銳)한 기병(騎兵)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라는 내용과 모순되어 이 부분은 실록이 쓰였을 당시 왜곡됐을수도 있다. * 극중에서는 이방원의 부인 민씨가 주변 종친들과 대신들을 설득하는 역으로 나오지만 이건 각색. 또 극중에서처럼 몰래 무기를 숨겨 이방원군을 무장시킨 것은 실제 역사상에 나오는 그녀의 행적. * 작중에서 이방석은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명하여 죽이는데 실제 역사상에선 이거이 부자가 사람을 시켜 죽인다. 사실 본작에서 이거이는 존재 자체가 증발(...)했으므로 어쩔수가 없을듯, 여담이지만 이방번은 회안군 이방간등이 사람을 시켜 죽였으며 실록에서는 이방원이 죽이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이거이 부자가 독단적으로(...) 죽였다면서 이방원이 이숙번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장면이 있다. * 이방원이 정도전의 장남 [[정진]]을 "대는 잇게 해주지"라며 아량을 베풀어 살려주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당시 정진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지방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양에 있었다면 그 역시 동생들과 같은 꼴을 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수군에 충원되어(조선시대 수군은 칠반천역 중 하나로 사실상 천민 취급을 받았다.) 몇년간 고생하였으나, 이후 태종이 사면해주어 복직되었다. 세종조에는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죄인의 아들치고는 상당히 잘 나간 셈. 다만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진이 지방에 있었어도 이방원이 쿠데타 성공 뒤 그를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텐데 실제 살려준 것으로 보아 극중에서와 같이 최소한의 아량은 베풀어 주겠다는 의식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대를 잇지 못하고 사후에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치러줄 자손이 없다는 것이 몹시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대를 끊어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최종 [[오의]]에 해당됐다.[* [[공자]]는 "처음 (나무 또는 흙으로 된) 인형을 만든 자는 후손이 없으리라!(始作俑者其無後乎)"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공자는 [[순장]]을 강하게 비난하는 사람이었는데, 무덤에 인형을 묻는 풍습에서 확대됐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가 과거에 인형을 처음 만든 사람을 당시 기준에서 최고로 심한 말로 저주한 것이다. 오늘날 역사학자·고고학자들은 당대의 인식과 달리 순장이 먼저 있었고 이후에 인형을 묻는 풍습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긴 하지만, 아무튼 이 표현에서 후손이 없다는 게 옛 사람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일로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후손의 존재는 노후 [[복지]]일 뿐만 아니라 사후 복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방원으로서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화를 면한 정진을 잡아다 죽였으면 기어이 남의 대까지 끊을 정도로 잔혹하다는 여론의 원성을 살 수 있으니 그건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이방원은 처가와 사돈 집안도 도륙낸 사람이므로 정진이 왕권을 위협하리라고 판단했다면 잔혹하다는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를 죽였을 것이다. * 남은의 최후는 실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실록에서 따온 부분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뿐이다. 실록에서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정도전이야 미워하는 자가 많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자진출두했으나 방원 일파에게 참살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뒷날 이방원은 즉위 후에 "남은이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작중에서는 송현방을 빠져나온 뒤에 전황를 뒤집기 위해 이지란을 찾아가지만 이지란의 집은 이미 이방원 세력에게 점령된 뒤였기 때문에 거기서 싸우다 죽는 걸로 묘사되었다. * 정도전의 최후는 실록의 최후 부분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을 수용해서 절명시로 알려진 자조를 읊고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록에 기록된 비굴한 최후에 대해서는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도전의 최후를 왜곡해서 전하는 대사를 통해서 나온다. * 극중에서 이방원이 정도전을 역적으로 몰아버리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정확히는 왕의 종친을 음해하려고 했다는 종친모해죄다. 그래서 정도전의 장남 정진이 빨리 복권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모죄였다면 빼도박도 못하는 가문 멸족. * 조준의 행보가 살짝 미화되었는데 실록에서는 조준이 난이 일어나자 점을 치면서 싸움의 행방의 가늠하다가 거의 끌려오다시피 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극에서는 민씨의 설득 끝에 마음을 결정하고 이방원에게 투신하는것으로 그려진다. * 정도전의 시신이 산기슭에 버려져 부인 최씨가 시신을 못 찾는 장면은 정도전의 무덤이 확실하게 발견되지 않은 것을 반영한 내용이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 사리원, 반계 유형원이 쓴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정도전의 무덤은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기록은 정도전이 죽은지 대략 200년이 지난 후에 쓰인지라 정확하지 않을 수가 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역 인근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 우면산 기슭에서 그 중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발굴했으나 지석이 있을 자리에 지석이 사라지고 없어서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무덤은 없다. 한편 정도전이 복권된 시기인 고종실록 9권, 9년(1872 임신 / 청 동치(同治) 11년) 3월 23일(정미) 1번째 기사에 따르면 "사손(祀孫)이 고한 바에 의하면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사판(祠版)[* 신주(神主), 위패]으로 제사를 받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고 한다. 해석하자면 후손들도 묘소 위치를 몰라서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